2007년 07월 04일
En attendant Godot


Living is killing time.
하이데거는 일생 동안 '죽음' 앞에 서 있을 수 밖에 없는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추적했다.
그는 '공허의 공간'에 그냥 '내던져지는 존재'가 인간이라며, 거기서 인간은 '권태'라는 '존재적 기분'에 빠져
단지 '시간을 죽이는' 삶을 살아갈 뿐이라고 했다. 이런 견해에 카뮈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고,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기억속의 지속>에서 자신의 삶을 '흐물흐물 죽어가는 조갯살 같은 시간'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디디와 고고는 고도를 기다린다. 언제 올지 모르는 미지의 인물 고도.
고도라는 존재는 디디와 고고를 권태로운 삶에서 구원해줄 그 어떤 것이다. 지금의 삶에서는 그 어떤 즐거움이나 희망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고도를 기다림으로 삶을 살아간다.
어제 왔던 곳인지 아닌지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의미 없이 '공허한 공간'에 디디와 고고는 서로를 의지한 채,
그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거나 의미를 부여하지는 못한다. 권태 속에서 의미 없이 그저 말장난을 하고 게임을 한다.

이들은 말 그대로 '시간 죽이기'를 하고 있다. 삶의 구원이 다가올 그 순간만이 중요하고, 그 순간을 기다리는 현재의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어떻게든 지루하지 않게 이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 
죽음=자유라고 볼 수 있다면, 이들은 삶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관계
디디와 고고는 서로를 의지한 채 살아간다. 고고에게는 디디가 있어야 실수하지 않을 수 있다. 디디는 그런면에서 고고에대해 우월감을 갖지만 정작 디디가 떠날까 두려워한다. 서로를 통해 외로움을 달랜다. 관계 맺음을 통해 존재감을 느낀다.
푸조와 럭키도 마찬가지다. 푸조와 럭키는 마치 매저키즘과 새디즘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어쨌든 둘 사이의 끈을 통해 연결되어 있고, 그 누구도 먼저 그 끈을 끊고자 하지 않는다.

디디와 고고 그리고 푸조와 럭키는 권태로운 행위 가운데 맺는 관계다. 디디와 고고는 처음에 푸조를 혹시나 고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을 권태로움에서 구원해 줄 존재가 아닐가 기대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푸조 또한 삶의 권태와 외로움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줄 또다른 고도를 기다리는 한 존재일 뿐이다. 푸조는 디디와 고고 또 럭키에게 자신에게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그 행위를 통해 존재감을 느낀다.

너와 내가 없이는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느낄 수가 없다. 사막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나, 관계함 없이 군중 속에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라는 이야기다. 지금 당신 옆에는 당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줄 누군가가 있는가.

by 눈빛 | 2007/07/04 11:15 | 하이퍼그라피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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