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6월 13일
내가 읽은 이방인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까뮈는 이런 말을 한다. “어떤 사나이가 유리창 저편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 이쪽에서는 그 말을 들을 수가 없다. 다만 무의미한 몸짓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쪽에서 우리는 다만 그가 왜 그런 몸짓을 했을지 고민한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아라비아 청년에게 총을 쏘았다. 그 이유는 뫼르소 자신도 모른다. 다만 아라비아 청년의 손에 들려 있던 단도에 반사된 날카로운 햇빛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재판장에서는 그러나 햇빛 때문이라는 뫼르소의 정직한 대답은 웃음거리가 된다. 사람들은 뫼르소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추론할 뿐이다.

이야기가 전개 되는 내내, 뫼르소는 그가 속한 세상의 ‘이방인’과 같다. 벌어지는 모든 일에 자신은 깊숙히 개입되지 않은 듯, 방관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뫼르소와 세상 사이에는 마치 유리창이 놓여 있는 것과 같다. 어떤 의미도 없었던 뫼르소의 행동들은 세상에 의해 해석되고 의미가 부여된다. 모든 일들은 인과관계로 맞닿으며 뫼르소를 냉혈한 패륜아로 규정짓는다. 재판에서 뫼르소는 무(無)가 된다. 자신과 상관없이 재판이 진행된다. 지금까지 뫼르소는 세상을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이번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서 멀어진다.

뫼르소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재판장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총을 쏘아 사람을 죽이고도 스스로 죄를 지었다고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다. 그도 그럴 것이 뫼르소는 이 세상 일 어떤 것에도 확신할 수 없었다. 마리라는 여자와 결혼을 해도 좋은지 아닌지, 레이몽이라는 사람과 내가 친구가 되도 좋은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다. 심지어 어머니가 죽은 날짜가 오늘인지 어제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피스톨을 손에 쥐던 그 순간에도, 총을 쏴도 좋고 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죄인인지 아닌지도 판단할 수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깨달을 뿐이다. 

마침내 공개처형이 선고된다.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던 뫼르소에게 이제 확실해 진 것이 생긴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그것이다. 감옥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뫼르소는 받아들인다. 어차피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는 부조리한 것이 아니던가. 죽음, 그것은 부조리로부터의 탈출이다. 자유다. 자유를 느끼는 그 순간 그러나 뫼르소는 표적과 별들이 가득찬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처음으로 세계에 마음을 연다. 의미 없는 것에 처음으로 의미를 느끼는 순간이다.

삶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받아들여야만 인간은 실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실존주의 자체가 실은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말하고 있듯이, 죽음에 가까운 순간, 부조리에서 탈출하기를 소원하는 순간 삶에 대한 의미를 뫼르소는 발견한 것이다. 시종일관 삶에 대한 권태로움이 독자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지만, 이 책은 사실 삶에 대한 애착으로 가득한 것이다.

 

by 눈빛 | 2007/06/13 10:50 | 하이퍼그라피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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