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5월 08일
be sensitve to violence

 

한나 아렌트는 20세기를 폭력의 세기라 부른다. 전쟁과 학살로 점철되었던 시기를 유태인으로서, 망명자로 살아온 그는 이 시기의 폭력을 그 누구보다 민감하게 받아들여 왔을 것이다. 21세기도 나아진 것이 없다. 폭력은 더욱 만연해 있다. 식민지 때부터 이어지는 종족 간 갈등과 패권 다툼이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폭력을 부른다. 

지난 달 한국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32명이 총기난사로 사망한 사건 때문이었다. 온라인에서는 한국 국민들의 애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 애도는 목숨을 잃은 32명에 대한 슬픔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피해를 입을까 우려하는, 미국에 의존적인 우리 사회의 이율타산적인 반응이었다.

미국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있은 이틀 후 이라크에서는 폭탄테러로 인해 160명이 사망했다. 우리 사회에 이 사실에 주목한 이는 별로 없다. 이들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하는 이도 없었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현대인들이 전 세계에 만연한 폭력에 대해 무감각해졌다고 한 말처럼, 우리는 폭력에 대한 반응이 없다. 그 폭력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직접적 영향이 없는 이상 말이다. 타인의 고통이 담겨 있는 사진을 바라보면서 나타나는 우리 반응은  기껏해야 연민뿐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재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우선, 정보의 이동이 쉬워졌다는 점이다. 폭력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면서 오히려 폭력에 둔감해졌다. 전쟁이란 우리와 상관없는 어느 곳에선가 으레 일어나는 일이 되었다. 세계 곳곳에 쉴 새 없이 일어나는 폭력들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 폭력에 의해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하루에 전쟁으로 죽는 어린이가 2000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는 개개인의 아픔이라기 보다 통계적 수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미디어에 범람하는 폭력 또한 영향이 있다. 그 영향력을 밝혀내려면 방대한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폭력적 미디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을 때 폭력적 성향이 되기 쉽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력이 우리시대 영화에 넘쳐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폭력을 영화 속 미학이라고 표현한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폭력을 왜 영화적 표현으로 택했는가에 대한 진지한 대답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의 무뎌진 감성은 타인의 고통을 덤덤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무뎌진 감성은 도덕성마저도 무디게 만든다. 민주주의 국가가 정치의 수단으로 전쟁을 선택한다. 한 나라의 대기업 총수가 보복 폭행을 자행한다. 그래도 위안 삼을 만한 것은 이들에 대한 비판과 자성의 여론이 뜨겁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판의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대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이어서는 안 된다. 강대국이어서, 재벌이어서가 아니라 폭력이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다. 폭력의 피해자와 나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혀야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폭력에 민감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이 아닌 우리의 고통으로 말이다. 

 


 

by 눈빛 | 2007/05/08 15:18 | 하이퍼그라피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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